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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9. 9世 〉6. <요재공>옥과훈도공휘희충제단음기(玉果訓導公諱希忠祭壇陰記)
1. 문헌 목록 〉9. 9世 〉8. <부정공>통훈대부사헌부감찰공휘개신묘갈명(通訓大夫司憲府監察公諱介臣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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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정공>승의부위휘신신묘갈명(承義副尉諱藎臣墓碣銘)
承義副尉諱藎臣墓碣銘 公諱藎臣官承義副尉姓趙氏貫玉川 高麗侍中諱璋爲上祖是生諱洪珪判書是生諱佺生員是生諱元吉號農隱與圃牧陶冶五隱之稱玉川府院君諡忠獻於公五世也高祖諱瑜號虔谷副正麗命之革守罔僕義享謙川祠杜門院曾祖諱斯文 贈吏曹參議祖諱智崑司憲府監察宰井邑有治績昆季湛樂有相好亭名聲膾炙一世考諱和忠武衛副司直妣令人光山金氏大將軍應昂女 成宗乙巳生公公以敦厚謹懿之性早揄染于詩禮之庭善事父母前後喪柴毀骨立至使吊者大驚事伯父郡守公一如柳仲郢之奉公權焉友于兄弟一室湛翕無愧爲相好亭之孫所蒙職卑人或有爲公慊之公輒曰何莫非國恩而且有先訓之辭尊居卑也何慊之有懼或不盡忠也 明廟壬子三月五日卒墓順天住岩面雲月峰飛龍村後鵲峰下考墓右麓子原配端人原州李氏 成宗丁未八月十三日 明宗癸丑三月二十日企生卒也雙封于公墓男曰貞老德老俱爲參奉女金垣金慶男長房生曰瑋訓鍊院奉事壬辰扈駕龍灣錄原從勳曰珩次房生曰璜瑗俱爲主簿曰環奉事以下蕃衍不可悉記嗚呼以公之賢其懿蹟宜不寥寥止此而世代久遠多失其所傳其爲子孫恨何如載雖然公一生所履以孝悌忠信四字爲主則瑣尾之行之不傳無足爲損也公墓將謀碑後孫相鉉淵攝畧具行錄遠耒求文不佞豈其人哉撮其槩而爲之銘曰 猗歟玉川氏湖中稱名門相好亭爲祖原從臣其孫承襲于孝悌傳授者忠懂惟公賢且哲於以識七分區區文字事何論存不存欝彼鵲峰陽寔公萬年宅親塋在于上弟阡即其側彷彿一室中侍奉且湛樂爲詔千百世蕪辭刻于石樵牧自相戒行過無不式 檀君紀元四千三百十一年 戊午重陽之節 坡平 尹丁鍑 撰 승의부위휘신신묘갈명(承義副尉諱蓋臣墓碣銘) 공의 휘는 신신(盡臣)이요, 벼슬은 승의부위(承義副尉)며 성은 조씨, 관향은 옥천 (玉川)이다. 고려시중 휘 장(璋)을 상조로, 생휘 홍규(洪珪)는 판서요, 생휘 전(佺)은 생원이며 생휘 원길(元吉)의 호는 농은인데 포은(圃隱)·목은(牧隱)·도은(陶隱)·야은 (冶隱)과 더불어 오은(五隱)의 칭호가 있었으며, 옥천부원군으로 시호는 충헌이니, 공의 五세조이다. 고조 휘 유(瑜)의 호는 건곡이며 벼슬은 부정인데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겸천사(謙川祠) 및 두문원(杜門院)에 배향하였으며, 증조 휘 사문(斯文)은 증 이조참의고 조휘 지곤(智崑)은 사헌부 감찰로 정읍현감이 되어 치적이 있었으며 四곤계가 우애하여 상호정의 명성이 일세에 회자하였다. 고의 휘는 화(和)로 충무위 부사직이요, 비는 영인(令人) 광산김씨 대장군 응앙(應昂)의 따님이다. 성종(成宗) 을사(一四八五)년에 공이 출생하였는데 공이 돈후근실한 성질로 일찍 시예의 정훈을 이어 받아 부모를 효도로 섬기고 전후상에 몸이 상하여 뼈만 남으니, 조상한 자들이 크게 경탄하였다. 백부 군수공을 섬기며 한결같이 유중영(柳仲郢)이 공권(公權)받든 것 같이 하였으며, 형제 우애함으로 온 집안이 화락하여 상호정의 후손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벼슬이 낮은 것을 사람이 혹 공을 위하여 불만족하게 생각하면 공이 문득 말하기를 「어느 것이 국운이 아님이 없고 또 높은 것을 사양하고 말직에 거하라는 선훈이 있으니, 무엇이 불만이리오. 다만 충성을 다 못할까 두려워하노라.」 하였다. 명종(明宗) 임자(壬子)년 三월 五日에 별세하니 묘소는 순천 주암면 운월치 비룡촌뒤 까치봉 아래 선고 산소 우록에 있다. 배는 단인(端人) 원주이씨(原州李氏)로 성종(成宗) 정미(一四八七)년 八월 十三일에 태어나서 명종(明宗) 계축(一五五三)년 三월二十일에 별세하니 묘소는 공의 묘와 쌍봉이다. 아들 정로(貞老)·덕로(德老)는 다 참봉이요, 딸은 김원(金垣) 김경남(金慶男)의 처며, 큰아들 左생 위(瑋)는 훈련원 봉사로 임진왜란에 어가를 의주에 호종한 공으로 원 종훈에 서록되었으며 차는 형(珩)이고 차방손 황(璜) 원(瑗)은 함께 주부요, 환(環)은 봉사며 이하는 번성하여 다 기록 아니 한다. 아! 공이 어질고 또 아름다운 행적이 마땅히 이와 같이 적막 아니 할 것인데 세대가 오래고 멀어 그 전한 것을 많이 잃었으니, 자손된 자의 한이 어떠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공의 일생 소행을 효제충신 四자로 주장하였은즉 미세한 행적을 전하지 못한 것은 공을 위하여 손색이 없도다. 공의 묘도에 장차 비를 세우고자 후손 상현(相鉉)·연섭(淵攝)이 약간의 행록을 갖추어 가지고 멀리 와서 문자를 청하니, 내가 어찌 그럴 사람이겠는가, 그 대강을 추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거룩하다. 옥천조씨는 호남의 명문이로다. 猗歟玉川氏湖中稱名門 상호정이 주고요, 원종신이 그 손자이다. 相好亭爲祖原從臣其孫 효도와 공경으로 이어 받아 전수한 자 충성하도다. 承襲于孝悌傳授者忠慬 오직 공이 어질고 밝음을 여기에 써 七분 알았으니 惟公賢且哲於以識七分 구구한 문자가 있고 없는 것을 어찌 의논하리오 區區文字事何論存不存 울창한 까치봉 남쪽은 곧 공의 만년유택이로다. 欝彼鵲峰陽寔公萬年宅 청산이 위에 계시고 아우 묘도가 곁에 있어 親塋在于上弟阡即其側 한 집안에서 모시고 또 우애한 것 같도다. 彷彿一室中侍奉且湛樂 천 백세에 교훈하고 거친 말을 돌에 새기니 爲詔千百世蕪辭刻于石 초동 목수가 스스로 서로 경계하고 길가는 자 樵牧自相戒行過無不式 구부리지 아니한 자 없을 것이다. 파평(坡平) 윤정복(尹丁鍑)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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